빈 편지지만 세 시간째 골라보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빈 편지지만 세 시간째 골라보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왜 편지지를 고르는 게 이렇게 어려울까

며칠 전 여자친구 생일을 앞두고 뭘 해줄까 고민하다가 결국 가장 클래식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거창한 선물은 이미 준비했으니, 거기에 곁들일 손편지가 꼭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다. 동네에 있는 대형 문구점에 들어갔다가 입구에서부터 멈칫했다. 편지지 코너가 생각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요즘은 예전처럼 단순한 줄지 편지지보다는 일러스트가 그려진 엽서나, 드라이플라워가 살짝 붙어 있는 카드 형태가 많았다. 나는 한참을 그 앞에서 서성거렸다. 하나를 집었다가 내려놓고, 다시 다른 디자인을 집어 들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고민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100일이나 1000일 같은 기념일도 아닌데 괜히 너무 무거운 걸 고르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아니면 너무 대충 고른 느낌이 들지는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만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엽서 한 장에 5천 원이라니

가격을 보고 조금 놀랐다. 예전에는 문구점에 가면 몇백 원이면 충분히 예쁜 편지지를 살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제대로 된 일러스트 엽서 하나에 3천 원에서 5천 원 정도는 기본이었다. 물론 퀄리티는 훨씬 좋아졌다. 종이 질감도 두툼하고 인쇄 상태도 깔끔했다. 하지만 막상 5천 원짜리 엽서를 들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찔렸다. 편지 내용이 그만큼 정성스러워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든달까. 옆에 있던 안개꽃이 작게 붙어 있는 드라이플라워 카드는 6천 원을 넘겼다. 꽃이 으스러지지는 않을지 걱정돼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고민만 하다가 빈손으로 나왔다. 쇼룸에서 가구를 고르다가 가격표 보고 놀라 결국 엽서만 사 온다는 어느 배우의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싶었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집 근처 소품샵에서 다시 시작된 고민

다음 날 퇴근길에 회사 근처 작은 소품샵에 들렀다. 여기는 조금 더 감성적인 디자인의 엽서들이 많았다. 문구점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대전의 어느 학교에서 학생들이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는 뉴스를 어디선가 봤던 기억이 났다. 그 아이들은 아마 어떤 마음으로 편지지를 골랐을까. 나는 괜히 진지한 척하며 봉투와 엽서 세트를 하나 골랐다. 가격은 3,500원. 이번에는 그냥 눈 딱 감고 결제했다. 돌아오는 길에 우체국에 들러 우표를 살까 고민했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메신저를 보내는 게 일상이니까 우체국을 갈 일이 거의 없었다. 우표를 직접 붙여서 보내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냥 직접 전해주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데 굳이 번거로운 짓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표는 사지 않았다.

막상 쓰려고 하니 손이 떨린다

집에 와서 책상에 엽서를 올려두었다. 펜을 들고 첫 문장을 쓰려고 하는데 막막했다. ‘생일 축하해’라고 적고 나면 그 뒤에 무슨 말을 이어가야 할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빽빽하게 글을 채우곤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뭔가 쑥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소년원에 있는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그저 절차만 궁금했지, 막상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려고 펜을 드니 그때 그 사람이 느꼈을 무게감이 문득 궁금해졌다. 표현하지 않으면 결국 잊히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엽서 위에서 몇 번이고 멈칫하게 된다.

일단 뭐라도 적어봐야겠다

사실 엽서가 너무 작아서 할 말을 다 적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길게 쓰고 싶은 마음과 짧고 굵게 임팩트를 주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충돌한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완벽하게 써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전하고 싶은 말이 정리가 안 된 건지 모르겠다. 엽서를 고르는 데만 며칠을 소비했는데, 정작 안에 들어갈 내용은 아직 한 줄도 적지 못했다. 그냥 내일 출근하기 전에 카페에 가서 짧게라도 휘갈겨 써야겠다. 어차피 예쁘게 쓰는 건 포기했으니까. 그냥 전달되는 게 중요하겠지, 싶으면서도 또 펜 끝을 자꾸만 머뭇거리게 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댓글 4
  • 엽서 가격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지는 느낌이네요. 저도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에 펜을 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아요.

  • 엽서 가격 때문에 왠지 마음이 복잡해지네요. 퀄리티는 좋아도, 부담스러운 가격 때문에 고민하는 게 느껴져요.

  • 엽서를 고르는 과정 자체가 꽤 시간을 들이는 것 같네요. 저는 보통 그냥 솔직한 마음을 담아 짧게 적어서 보내는 편인데, 이렇게 꼼꼼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 엽서 가격 때문에 마음이 묘하게 불편하더라구요. 특히, 편지에 담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느껴질 때, 가격 때문에 그런 마음을 표현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